1화. 오늘도 만년 E급입니다
협회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 이번 분기 헌터 등급 갱신 명단이 떠 있었다. E급 헌터 명단은 다른 등급에 비해 스크롤이 유난히 길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한 이름 옆에만 작은 숫자가 붙어 있었다. 갱신 횟수였다.
이도현 — E급 (갱신 47회)
협회에 각성 등록을 한 지 육 년째, 등급 재시험을 마흔일곱 번 봤는데도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은 헌터는 전국을 통틀어 도현이 유일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만년 E급"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동정이었고, 삼 년쯤 지나자 농담이 되었고, 지금은 그냥 고유명사였다.
"또 왔네, 만년 E급."
접수처 직원이 익숙하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도현은 가볍게 목례하고 재시험 신청서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이미 마흔일곱 번째로 똑같이 채워질 결과가 예정되어 있었다.
측정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원통형 측정기 중앙에 손을 얹고, 도현은 숨을 골랐다. 눈을 감으면 몸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파도라기보다는 바다에 가까운 것. 그 바다를 통째로 우물 안에 가두듯이, 아주 작은 틈만 열어 한 방울만 흘려보낸다.
측정기의 파란 불이 깜빡이다가, 낮은 신호음과 함께 숫자를 뱉어냈다.
[측정 결과: E급 / 마력 지수 12]
합격이었다. 도현이 원하는 의미에서. 우물 안의 바다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육 년 전이나 지금이나,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
측정실을 나서던 도현의 걸음이 로비 중앙에서 자연스럽게 멎었다. 정확히는, 걸음이 멎었다기보다 시야가 먼저 붙잡혔다.
사람들 틈으로 큰 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정확히는 사람들 쪽에서 그 사람 주변으로 반원형의 거리를 만들고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들 곁눈질만 할 뿐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는, 그런 거리. 그 중심에 강시우가 서 있었다.
국내 랭킹 1위. 유일한 현역 S급 중에서도 유일하게 '더블 에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헌터. 매체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화면으로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고, 화면과 실물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보였다.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공기가 다르게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조금 늦췄다. 그냥 지나치면 되는데, 몸이 먼저 시선을 붙잡아 뒀다.
왜 눈이 가지.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 채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강시우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갔다. 눈이 마주쳤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다가, 그러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그냥 짧게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뛴 걸 애써 무시했다. 유명인을 실물로 봐서 놀란 거라고, 그렇게 결론 내리고 넘어가려는데—
"저기요."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도현은 자신을 부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걸음을 옮기려다가, 발소리가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느끼고서야 돌아봤다.
가까이서 보니 더 심각했다. 큰 키도, 낮은 목소리도,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매도. 도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다 실패하고, 대신 애매하게 턱만 조금 당겼다.
"저요?"
"네. 이도현 헌터님 맞으시죠."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나쁜 쪽으로도, 아닌 쪽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흔들림이었다.
"제가 이도현인 건 맞는데… 무슨 일이시죠."
"협회에서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 들으셨어요? 상위 랭커랑 하위 등급 헌터를 짝지어서 던전 동행 훈련을 시키는 거."
도현은 오늘 아침 뜬 공지를 떠올렸다. '헌터 성장 지원 프로그램 — 상생 던전 동행'.
"제가 그거에 왜…"
"저랑 파트너로 배정됐거든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이도현 헌터님. E급, 갱신 마흔일곱 번. 협회에서 이번 프로그램 상징적인 사례로 밀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전국에서 가장 오래 정체된 헌터와 전국 1위 헌터의 동행'."
말투에 비웃음은 없었다. 딱딱할 정도로 사실만 나열하는 투였는데, 그게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자기 얘기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거절할 수 있는 거죠?"
"이론적으로는요."
"그럼 거절할게요."
도현은 최대한 담백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진 건 본인도 못 들은 척했다.
강시우가 그를 잠깐 응시했다. 시선이 얼굴에서 손으로, 다시 얼굴로 짧게 옮겨 갔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인데, 그 눈에 담긴 게 순전히 계산만은 아닌 것 같아서 도현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됩니까?"
"제가 발목 잡을 게 뻔해서요. E급이 S급 던전 동행에 껴봤자 짐밖에 안 되잖아요."
"동행할 던전은 E급 기준으로 배정돼요. 위험할 일 없습니다."
"그럼 더더욱 제가 낄 이유가 없죠."
강시우는 그 말에 아주 잠깐 미간을 좁혔다. 뭔가 반박하려다가, 대신 반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거리가 좁혀진 만큼 도현의 숨이 짧게 멎었다.
"거짓말 잘 못 하시네요."
"…네?"
"짐 될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에요, 지금."
도현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강시우의 눈이 자신의 표정 어딘가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다는 게, 벗겨지는 기분이 들 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음 주까지 답변 드리면 될까요?"
"…이미 답은 드렸는데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단호한데 부드러운, 이상한 어조였다. 도현은 뭐라 더 말하려다 그만두고 목례만 했다. 돌아서서 몇 걸음 걷는 내내, 등 뒤로 시선이 계속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심장은 아직도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고, 도현은 그게 순전히 짜증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우겼다.
*
협회 건물을 나선 도현은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남부 관할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아침 게시판에 붙어 있던 '등급 판정 지연' 균열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 균열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의 결이, 협회가 임시로 매겨둔 D급짜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구역 초입에 도착하자 통제선 안쪽에서 신입 헌터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에 뭐가 더 있어요! D급이 아니에요, 이거!"
지원 인력 도착까지 최소 십 분. 뒤처진 신입 하나가 발을 접질려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못했다.
도현은 통제선을 넘었다.
균열 안쪽,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사이로 몸을 낮춘 도현의 눈앞에 형체가 드러났다. D급으로 등록됐던 존재는 실제로는 B급 상위에 근접한 개체였다. 몸통만 3미터가 넘는 것이 신입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도현은 자기 안의 우물에서 아주 작은 틈을 다시 열었다.
딱 한 방울.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옅은 빛이 개체의 다리 관절을 관통했다. 육중한 몸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도현은 그 틈에 신입의 팔을 잡아 끌어냈다.
"괜찮아요? 뛸 수 있어요?"
"네, 네…!"
신입을 통제선 밖으로 밀어낸 순간, 도현은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지원 헌터들이 도착해 정리할 정도의 개체였고, 자신이 나설 이유는 이미 끝났다. 딱 거기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방금 뭐였어요? E급 헌터가 어떻게 그걸 넘어뜨려요?"
"운이 좋았어요. 급소를 정확히 찔렀나 보죠."
거짓말은 아니었다. '운'이라는 단어가 가려주는 진실의 크기가 조금 클 뿐.
돌아서던 도현의 눈에 통제선 반대편의 인영이 들어왔다. 강시우였다. 지원 요청을 받고 근처에 있다가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눈이, 조금 전 자신에게 "거짓말 잘 못 하시네요"라고 말하던 그 눈과 똑같은 온도로, 지금 이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게 의심만은 아니었다. 도현은 그 눈빛에서 뭔가 다른 것 — 놀람과 흥미가 뒤섞인, 자기도 걷잡지 못하는 듯한 감정을 읽어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몇 초쯤 그렇게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시선을 거둔 건 도현이었다.
*
다음 날 오전, 협회 3층 상담실로 호출을 받았을 때만 해도 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제 균열 현장에서의 일을 정식으로 보고하라는 절차겠거니, 그 정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생각이 무너졌다. 담당 직원 맞은편에, 이미 강시우가 앉아 있었다.
"어, 저는 균열 보고 때문에 온 건데…"
"압니다. 그것도 같이 처리하려고요."
담당 직원이 서류철을 내밀었다. 상단에 큼지막하게 찍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상생 던전 동행 프로그램 — 파트너 확정 통보서. 도현의 이름과 강시우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저 어제 거절했는데요."
"어제 강시우 헌터님께서 프로그램 운영진에 직접 요청하셨어요. 예외 승인으로 처리됐고요."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봤다. 강시우는 딱히 미안한 기색도 없이 그를 마주 봤다.
"제가 분명히—"
"거절하신 이유가 짐이 될까 봐서라면서요. 그런데 어제 보니까 던전 안에서 신입 하나 구하는 거, 저보다 반응이 빠르시던데."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는데, 그 안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도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반응 속도를 지적당한 게 처음이라,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짐 될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담당 직원이 눈치를 보며 서류를 슬쩍 내밀었다. "여기 서명만 하시면…" 도현은 펜을 집어 들다가, 반대편에서 동시에 서류를 잡으려던 강시우의 손과 손끝이 스쳤다. 아주 짧은 접촉이었는데, 도현은 그 온도가 예상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는 걸 느끼고 당황했다.
"먼저 하세요."
강시우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데, 도현은 그가 방금 그 접촉을 완전히 무심하게 넘긴 건지, 아니면 자신처럼 뭔가를 느꼈는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 자체가 낯설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서명란에 이름을 적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현은 그게 짜증 때문이라고, 이번에도 그렇게 우겼다.
"첫 동행은 이번 주 금요일, 강남 3구역 던전입니다. E급 기준 던전이라 위험도는 낮아요."
서류 처리를 마치고 상담실을 나서는데, 강시우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긴장돼요?"
"…아니요."
"목소리가 긴장한 사람 목소리인데."
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쏘아봤다. 강시우는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살짝 웃는 것처럼 입꼬리가 움직였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화면에서도, 어제도 보지 못했던.
그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도현은 복도를 걸어 나가는 내내, 방금 스쳤던 손끝의 온도와 방금 본 웃음을 번갈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짜증을 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신경 쓸 여유가 없는데.
금요일까지, 나흘 남았다.
*
도현의 집은 협회 지원 주택치고는 작았다. 원룸 하나, 창문 하나, 화분 하나. 육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짐을 최소한으로 유지해 왔다.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언제든 사라질 수 있게.
침대에 누운 도현은 천장을 오래 바라봤다. 몸속 깊은 곳의 바다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어제 균열에서 힘을 흘려보낸 여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손끝이 다시 그 온도를 떠올렸다. 서류 위에서 스쳤던, 아주 잠깐의 접촉.
별거 아니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봐도, 눈을 감으면 자꾸 낮에 봤던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웃음. 화면 속의 냉정한 랭킹 1위와는 다른, 아주 잠깐 흐트러진 얼굴.
도현은 육 년 동안 아무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곁을 내준다는 게 뭔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웃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 그게 유일하게 안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 그 거리가 자꾸 무너지려 했다. 강시우가 다가올 때마다, 도현은 물러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위험해.
본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시우가 위험해서가 아니라, 시우 앞에서 무너지는 자기 자신이 위험해서. 육 년 동안 단단히 다져온 벽에, 첫날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도현은 눈을 감았다. 우물 속의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나흘 뒤의 금요일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
같은 시각, 협회 숙소 창가에 앉은 강시우는 낮에 찍힌 사진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균열 현장 CCTV에서 캡처한, 도현이 신입의 팔을 잡아끄는 순간의 정지 화면이었다. 정확히는 개체를 넘어뜨리는 장면을 분석하려던 거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신입을 살피는 도현의 표정만 몇 분째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이 사람한테 눈이 가지.
강시우는 그 생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대신 협회 내부망을 열어 정식 조회 절차를 밟았다. 문서명: 이도현 헌터 각성 이력 전체 조회. 이유는 명백했다. 숫자가 맞지 않으니까.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까.
기록은 육 년 전, 최초 각성 시점에서 뚝 끊겨 있었다. 그 이전 데이터는 전부 삭제 처리, 접근 권한 최상위. 열람 사유 입력란에 커서가 깜빡이는 동안, 강시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적었다.
[열람 사유 : 프로그램 파트너 적합성 검토]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절반은. 나머지 절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낮에 마주쳤던 눈빛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서라는 걸, 강시우는 아직 스스로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